2012년 11월 26일 월요일

삼성 호암 이병철의 전력

-호암의 집안은 일찍부터 학문뿐 아니라 이재에도 힘을 기울여 호암의 조부 대에 이르러서는 천석지기에 하인만도 30여 명이나 거느린 부유한 가문이 되어 있었다.
-그가 태어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는 지리산 산자락의 깊숙한 내륙이었다. 더구나 중교리는 옛날부터 선비들이 숨어지낸다는 은둔의 고장이었다.

-호암이 열한 살 때였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둘째 누이의 시댁이 있는 진주로 갔다. 그곳에서 일본어로 공부하는 일본식 학교인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수송보통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쳤다.

-26살. 3백 석 재산 물려받아 사업자금 확보. 합천의 정현용 박정원 두 사람과 마산에서 동업, 1936년 봄, 북마산에 부지를 마련하고 설비를 갖추면서 마산에서 제일 큰 정미소를 개업했다. '협동정미소'로 상호를 정했다.
-2년 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마산 일출 자동차회사'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호암은 즉시 트럭 열 대로 운영하던 그 회사를 인수하고, 거기다가 열 대를 더 구입해서 트럭 20대로 운수사업을 시작했다. 호암의 두 번째 사업이었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당시 마산에는 '천해관'을 비롯해서 한국식 요정이 서너 군데가 있었고, '망월' 등 일본식 요정이 다섯 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호암은 그 모든 요정의 단골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일본인 모두 합쳐 약 80~90명의 기생이 있었는데 빠짐없이 낯을 익혔다고 하니 어느 정도 요정을 자주 드나들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호암의 경우 대체로 알려져 있는 여성편력은 젊었을 때, 곧 이 무렵 기생들과 어울렸던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한다.

-도쿄의 '오오쿠라' 호텔은 그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머문 단골 거처로 유명해진 곳이다. 이처럼 일본 왕래를 빈번하게 하면서 호암은 자연스럽게 일본 여인과 인연을 맺은 듯하다. 호암의 연보에는 1953년 4남 태휘가 태어났으며, 1962년 혜자가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호암의 생전에는 자주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다가 한동안 한국에서 살기도 했다. 4남 태휘는 한때 CJ의 상무로 근무하기도 했지만, 호암이 작고하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포함하면 3남 5녀가 아니라 4남 6녀)

정규웅 《삼성가의 불편한 진실》, 머니플러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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