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책의 서문에서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경험과 지식이라 해도 이를 기록하거나 타인과 공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잘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종의 지식공유에서는 우리가 일본보다 시대에 좀 뒤떨어진 감이 있다."며 집필동기를 밝히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6.25 전쟁 중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홀로 되시면서 한 살짜리 젖먹이 딸, 여섯 살인 딸, 열한 살 아들인 나를 책임지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은 8.15해방 전 함경남도 북청에서 서울로 와 정착하였으나 1.4후퇴 때 피난지 부산에서 아버님을 여의게 된 것이다.
고향이 이남이고 일가친척이 많고 부모님이 다 살아계셨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사고무친한 부산에서 그 어려운 시절, 삼십 세 여인네 혼자의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학교도 보내려면 무슨 맘을 먹고 어떠한 길을 걸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하다. 하지만 나에겐 힘들게 고생하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많이 그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자신의 힘든 모습을 결코 내색하지 않으셨고 그런 모습을 자식들 앞에서 보이지 않으려 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특히 먹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학교를 진학하는 것도,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군대를 가는 것도, 직장을 택하는 것도 가난을 벗어나고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변수가 아니라 절대적 상수였다.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장학금 혜택과 동시에 아르바이트(과외공부)를 하면 수입도 꽤 되어 나 자신의 생활뿐 아니라 집안의 생계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군대를 가는 것도 사병으로 가면 복무기간은 짧으나 집안의 생계는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ROTC 장교로 복무하기로 했으며, 육군 소위의 봉급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와 동생의 학비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전역 후 단 하루의 공백도 없이 곧 직장을 잡아야 하는 여건이어서 장래성만 있으면 전공과 관계없이, 급료가 많고 적음을 떠나 빨리 잡아야 했다. 그래서 정밀광학공업이며 일본 기술이 주가 된 대한광학의 창사 멤버로 취업하여 그 회사에 7년간 몸담게 된 것이다.
-열한 살 나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지만 왜 나의 머리 속에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는지 모르겠다.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로 일찍 세상을 뜨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정을 일으키고 동생들을 돌봐 줄 것을 기대했을 어머니에게 장남인 나는 아마 전부였을 것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항상 행상으로 정신이 없으셨던 어머니와 같이 식사를 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머니에게 있어 나는 가장이었고 가문의 기둥이었고 희망이었다. 먹을 것이 생겨도 내게 먼저 주시곤 했었다.
-나라 전체가 어려운 부산 피난 시절, 삼십 세 청상과부의 몸으로 어린 자식들을 안고 아무 친척도 친지도 없는 외지에서 살아가는 길이란 무서운 결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오늘 밤 59세에 작고하신 슈퍼우먼 어머니가 새삼 그립다.
-어머니가 행상으로 돈을 모아 그 이자로 근근이 생활을 할 때 그 돈을 친지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나는 대학은 농대나 의대를 가고 싶었으나 의대는 6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고 학비도 많이 들기에 뜻을 접고 학비가 적게 들고 취직이 잘 되는 공대를 택했다. 내 나이가 60대 이후가 되면 그 때 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당시 나의 꿈을 일단 접으면서 가졌던 결심이었다. 하루 빨리 대학을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했으며 성공해서 넉넉한 생활을 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피난 온 우리 가정은 집안일을 누구와 의논하여 정할 입장이 못되었다. 실제 집에서도 대학 진학과 같은 일을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휘문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입학시험과 대학 진학 문제도 누구와 의논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나 혼자 결정하여 시험을 쳤고 그리고 합격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내 생활은 학업과 돈 버는 일의 반복이었다. 장학금으로 학비는 어느 정도 가능했으나 집안의 생활비와 부족한 학비를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게 있어서 대학의 낭만이나 자유는 사치였으며 내 대학생활은 절박한 생존의 현실 그 자체였다.
-병역의 의무도 사병으로 군대를 가면 근무기간도 짧고 나 하나의 생활은 해결되나 가족의 생활은 해결이 안되어 결국 대학에서 ROTC 장교후보생 코스를 택하게 되었다. 군대에 장교로 가면 나 자신의 생활뿐 아니라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길이었다. 비록 많은 급여는 아니지만 초급장교의 월급 80%를 집에 송금했던 것으로 장남으로서 행한 나의 의무였고 작은 보답이었다.
-군 복무기간 동안의 장교생활은 남을 이해하고 통솔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 장교로서의 군 생활은 제대 후 걸어갈 새로운 인생에 많은 것들을 미리 경험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부하를 어떻게 통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를 배우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합리적인지를 체득하는 좋은 기회였다. 비록 군대와 기업조직은 다르지만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와 뜨거운 열정은 차이가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는 기업에 취직을 하면서 내 인생의 꿈을 이룰 기회를 하나씩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가난한 집의 가장인 나는 일차적으로 가정을 일으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후 산업전선에서 일을 하면서 차츰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일생을 바쳐서 일할 분야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공개석상에서나 인터뷰를 할 때 나의 인생관이 무엇이냐 혹은 좌우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라고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또 힘을 많이 얻게 되는 금언이 무엇이냐 물으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을 해준다. 이런 말들은 나에게 세상을 사는데 용기를 주고 지혜를 주었던 것들이다.
학창시절엔 열심히 공부하니 장학금도 타고 생활비도 벌면서 생활했다. 얼마 전 아팠을 때도 의사의 말을 잘 지키고 약을 잘 먹고 하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남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니 내가 어려울 때 성심껏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이런 말들이 그대로 들어 맞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인생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서른세 살에 개발부장이 되었을 당시 친구를 만나보니 그는 과장대리인데도 봉급은 내 봉급의 거의 2배 이상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일해도 박봉에 시달리니 이건 너무하다 싶고 회사에 실망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대한광학에서 근무한지 7년만에 대한전선(대우전자)으로 직장을 옮겨 약 2배 이상의 봉급을 받고 TV 생산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11년째 근무하던 해에 현재의 노키아TMC로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회사에서는 이 분야에 정통한 새로운 사장감을 찾고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적임자로 보고 나에게 내가 받는 월급의 3배 이상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나는 그 때 그 정도 수준의 월급을 받으면 대기업에서 15년간 일해서 받는 월급을 단 5년 동안에 받는 셈이니 나머지 10년은 아무런 불만없이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운이 좋아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사실은 지나가는 기회를 붙잡을 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더 높은 것을 위해 경력도 쌓고, 실력도 기르고, 어학도 열심히 한 덕분이다. 대학 다닐 때 친구들 중에는 정말 머리가 좋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기려면 그들이 한두 번 책을 볼 때 나는 열 번 스무 번 본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몰두했다. 머리 좋은 것만 믿고 이것 저것 다른 일을 할 대 나는 오직 한 가지 공부에만 집중했다.
기업에 와서도 나는 이것만은 기필코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일에 몰두했다. 다른 것 다 해가면서 비교우위를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를 얻으려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인 것이다.
-핀란드는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비슷하여 열강에 둘러싸여 있고 열강의 힘의 변화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는 나라이다. 스웨덴, 소련, 그리고 독일에 둘러싸여 약 700년(12세기~19세기) 가까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20세기에 걸쳐선 약 100년간 소련의 지배를 받았었다. 독립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우리나라 3.1운동과 비슷한 시기에 백군과 소련 지원의 적군이 충돌하여 백군이 승리함으로써 1919년 핀란드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소련의 침공에 대항한 겨울전쟁시에는 16만의 병력으로 120만 병력, 3000대의 항공기, 1500대의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을 물리쳤으나, 여름 재침공 때는 전황이 크게 핀란드에 불리하게 전개되어 스웨덴의 중재로 많은 땅과 섬들을 소련에 배상하였다. 이름해 일어난 소련과 독일과의 전생에서는 독일편을 들어 싸웠으나 불행히도 독일의 패망으로 다시 소련의 영향권(즉 위성국가)에 들어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핀란드는 전체 인구의 1/6이 거주하고 전 국토의 1/10에 해당하는 갈레리아 지역과 많은 전쟁보상금을 소련에 주는 조건으로 겨우 독립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핀란드는 2차대전 후 상대국에게 유일하게 배상을 해준 국가인 반면에 독일, 이태리, 일본 등은 오히려 전승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국가였다.
-내가 검도협회 회장을 맡고 그 쪽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내가 검도에 관심이 많아 고교시절 시작한 검도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선생과 운동할 곳이 없어 중단하게 되었다. 일에 바빠 검도를 잊고 있던 중 경남에 와서 학교 등 여러 곳에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검도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검도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이나 공부한 결과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증 공부벌레보다는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진 사람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요즈음 젊은이들이 국가나 사회로부터 받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예절 또한 많이 부족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검도를 통해 예절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검도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기 위해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해온 대표적인 수련 종목이다.
내가 경남검도협회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경남에는 검도장이 거의 없었다. 당시 우연하게 검도 7단의 어른을 만나게 되었고 나는 그 분에게 내가 검도 보급을 위해 지원을 할테니 검도장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분이 검도장을 열게 되었고 본격적인 경남 검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간에 경영자는 시대와 시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상황이 급변하는 시대에선 조금만 잘못하면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영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변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경영자는 신문 하나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생활한다.
윗사람이 항상 아랫사람 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로만 하지 말고 자신부터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위에서부터 철저하게 학습하는 풍토가 지금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선 기업의 사활을 결정짓는다.
-우리나라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사람이 많다. 자기 개인적인 이익만을 탐하고 조직을 망치는 현상들은 가정 및 학교교육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나는 칭찬과 포상도 개인보다는 팀을 중심으로 한다. 칭찬이나 상을 개인적으로 혼자만 받는다면 개인에게는 말할 수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숫자가 많으면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일 수가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여러 중역들이 보는 자리에서 칭찬이나 포상을 함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더 높여주려 애쓴다. 왜냐하면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칭찬을 받거나 상을 받으면 더 신바람이 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하는 것이 일곱 가지이고 못하는 것이 세 가지라면 대개 사람들은 못하는 세 가지만 갖고 떠들기가 쉽다. 잘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못하는 것만 얘기해도 안 된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실수를 하게 되는데 못하는 것만 갖고 꾸중을 하여 풍파를 일으키는 일이 우리 주위에 너무 많다.
-외국기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간부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의 의견을 듣고 토론을 통해서 무엇을 결정하고 쟁취하는 일이며 똑같은 사람이라도 계속하여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위 평생교육이 몸에 배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학습하지 않으면 탈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미나나 워크숍을 통해 계속 공부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다.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여 제시하고 브리핑을 할 때도 각자 의견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한다. 설사 반대 의견을 내도 결정한 것에는 수용하고 따르는 것이 문화로 정착해 있다. 따르지 못하는 경우는 대개 사직한다. 토론은 자유이나 일단 결정하면 다수 의견을 따른다는 것이 철칙이다.
-우리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모인 회의에선 대부분 말을 아끼려는 속성 때문에 활발한 의견 개진이 힘들다. 따라서 5명 미만의 소그룹으로 토론을 하게 되면 발언의 기회도 많아진다. 그 경우 간부나 리더를 포함시켜 토론에서 운영의 묘미를 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간 매출 3조 4700억 원에 달하는 외국인투자기업의 최고경영자이다.나의 경우는 일가친척, 친구 그 어느 누구도 우리 회사와 거래를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회사 내의 중요한 위치에 발탁하여 쓰지도 않는다. 이것 역시 tmc가 제조회사로서 기적의 경영성과를 낳으며 18년간 계속적으로 발전하고 최고의 기록인 1인당 350만불의 수출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대한전선이 대우전자에 흡수되면서 내가 중책을 맡고 일하던 구미공장에 외국사람들이 많이 방문을 하게 되어 공장에 관한 브리핑 및 안내를 직접 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것은 탠디 회사가 나의 능력이나 사람 됨됨이를 사전에 파악해보려고 한 것이었다.
-1984년 회사 초창기에는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 내가 86년 5월 1일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내가 오기 1년 반 동안 사장이 세 명이나 바뀌었다. 평균 6개월마다 사장이 바뀌었다는 얘기인데 이것만 봐도 회사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업원도 180여 명에 불과한 우리 회사는 작은 공장에서 자동차용 휴대전화기를 생산하는 소규모의 외국계 중소기업이었다.
-그 변화는 모두에게 자신들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들의 힘이 회사 발전에 필요하다는 확신을 심어줌에 따라 이런 기운이 확산되자 우리 회사는 서서히 신바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나는 참으로 기뻤다. 내가 입학하고 싶은 대학은 서울농대였으나 어머님의 반대도 있고, 또 하루빨리 돈을 벌어 가정을 꾸려가야 했기에 공대를 선택하게 되었지만....
-신바람 경영이란 말의 핵심은 종업원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 방식대로 뜻을 펴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으로 사원들의 아이디어와 뜻을 대부분 수정하지 않고 수용하고 내가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변경하도록 지도하여 업무를 추진하는 것이다. 나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면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면 '내 생각은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얘기해주는 것으로 그친다. 요약하면 '네가 하고자 하는 뜻대로 일을 처리해라. 그리고 너의 책임 아래서 일을 마무리하라.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다' 하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즉 책임보다 권한을 더 많이 주어 일을 찾아서 하게 하는 것이다.
-사원들이 공모해서 정한 사훈이 있다. 사원들에게 아이디어를 공모하고 그 중에서 우리 회사의 경영철학이나 비전을 제일 잘 반영한 것을 채택하였다. 사훈을 '인화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으로 한 것도 우리 회사 전 구성원들이 바라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집약해서 정한 것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그런 자원을 엮어 하나의 큰 역량으로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바로 믿음과 신뢰이다.
-의사소통이 잘 되려면 서로 믿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인간적인 예우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일에 대한 결정에서 빠른 피드백이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한 적절한 칭찬이 뒤따라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남의 잘함과 장점만을 이야기하고 남의 결함과 잘못은 감싸주되 꼭 말하려면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장 가까운 형제지간에도, 부부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사항이다. 하물며 남의 약점을 이야기함은 금물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열심히 일에 몰두해있으면 그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저절로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래서 몰두한다는 것에는 전염성이 있어 조직 전체가 일에 몰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이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얻는 물질적 혹은 금전적 성과보다 중요한 것은, 진정 나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성취감이며 일에서 얻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전 사원들에게 노키아를 3년 안에 경남에서 1위, 5년 안에 우리나라에서 1위, 10년안에 세계에서 반드시 1위를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목표가 정해지면 모두 뭉쳐 과감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인구가 600만 명 안팍으로 우리보다 1200만 명 많은 정도이지만, 남북한을 합치면 우리보다 훨씬 적다.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참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며 과외수업이나 사교육은 물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시키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 눈으로 보면 느슨하게 교육받은 프랑스는 세계에서 1등 가는 '라파엘' 전투기, '떼제베' 고속열차를 만들고, 조각, 미술, 문화에서도 세계 일류이고, 농업도 세계에서 4등의 국가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이 공부하는 듯 했는데 그들보다 아직까지 한참 뒤떨어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대한광학이라는 신설회사의 창립멤버로 들어가 초기에는 기계 설치를 위해 웃통을 벗고 기계를 옮기는 일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을 다 해가며 공정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7년간 근무하면서 승진도 하고 능력도 인정받았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던 중 고양이의 머리로 있느니 차라리 호랑이의 꼬리가 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대기업은 모든 일이 조직화되어 있고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있어 자신이 하는 전문적인 일 외에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발휘할 기회가 적다. 거대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원천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체계화되어 있는 조직이 아니므로 상대적으로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물론 급여나 근무여건은 대기업에 비해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일을 배우는 데에는 중소기업이 훨씬 폭이 넓고 다양하기 때문에 회사를 전체적으로 보고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는 유리한 점이 많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댓글로 당신의 의견을 남겨주세요.